산행기

노천 박물관 경주남산 (南山468m)- 금오산(金鰲山468m)과 고위산(高位山494m)

월매스 2013. 1. 14. 00:26

노천 박물관 경주남산 (南山468m)- 금오산(金鰲山468m)과 고위산(高位山494m)

산행일자;2013년1월13일(일). 날씨; 맑음. 산행거리;9.80km .산행시간;약3시간10분(후미기준 약5시간)

 

 

 

국토의 70%가 산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이름의 산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남산ʼ(南山)이 아닐까 싶다.애국가 중에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ʼ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보통 남산이라 하면 “서울의 남산”이라고 생각하지만 앞에 있는 산 또는 남쪽에 있는 산을 모두 남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전국에 ‘남산ʼ이란 이름을 가진 산은 많다.

 

그 많은 남산 가운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보물같은 산이 “경주의 명산 남산”이다. 이 산은 전체가 노천 박물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높이가 500m도 채 안되고, 산세가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립공원이 됐고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됐다.

 

경주 남산(南山468m)은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남쪽에 남북으로 솟아 있는 산이다. 고위산(高位山, 494m)과 금오산(金鰲山, 468m) 등 2개의 봉우리가 남산을 대표하는데, 이 중 금오산(金鰲山, 468m)은 남산을 통칭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남북길이 8km, 동서길이 12km, 34곳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완만한 동남산(東南山) 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西南山) 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남산의 동쪽에는 낭산(狼山)·명활산(明活山),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벽도산(碧桃山)·옥녀봉(玉女峰), 북쪽에는 금강산(金剛山)·금학산(金鶴山)이 솟아 있으며 토함산(吐含山)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금오산(金鰲山468m)과 고위산(高位山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개의 계곡길과 산줄기로 이루어진 남산(南山468m)에는 1백여 곳의 절터와 60여구의 석불과 40여기의 탑이 있다.신라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경주는 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다. 그 중 신라인들이 천년을 두고 다듬었던 남산은 그 자체가 신라인들에게 절이요, 신앙으로 자리한다. 한 구비를 돌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불이 맞이하고 골골이 남아 있는 수많은 절터와 유적은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그러기에 남산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인 것이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뻗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곳곳에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만날 수 있다.

 

경주사람들은 흔히 ‘남산을 오르지 않고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들 한다. 남산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13개, 사적 12곳, 지방유형문화재 9개와 중요 민속자료 1개로 곳곳에 유적이 산재해 있다. 경주 신라문화원이 제작한 경주 남산지도에는 순례길만 70여개를 잡아놓았을 정도니 비록 산은 낮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등산로다.

 

남산에서는 BC 10∼BC 6세기 무렵의 유물로 추정되는 민무늬토기·간돌도끼(磨製石斧마제석부)·간돌칼(磨製石刀마제석도)·홈자귀(有溝石斧유구석부)·방적차(紡績車)와 함께 고인돌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남산은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蘿井), 신라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신라가 종말을 맞았던 포석정(鮑石亭)이 있던 곳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남산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로서도 이름이 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 숭산신앙(崇山信仰)·암석신앙과 연관된 불교문화는 남산에 집중, 표현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유적은 절터 112군데(암자터 포함), 석불 80체,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이다. 금오산·고위산·도당산(都堂山)·양산(楊山) 일대 즉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을 비롯한 4개 동과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용장리(茸長里) 등 1813만 4635㎡의 지역이 1985년 사적 제311호 <경주남산일원>으로 지정되었다.

 

 

2013.01.13(일) 07;00 사당역 10번 출구에서 J산악회버스 2호차에 탑승 경주 남산 탐방길에 든다.

경주 남산은 오래전(약30년전) 막내 동생의 영천에 있는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 날 직장을 2박3일 휴가 내어 손아래 동생과 함께 어머님 모시고 참석하였다가 경주시내 가족 관광길에 잠시 주마간산격으로 100대 명산 남산을 한 것으로 하다보니 그동안 마음이 찜찜한 산이기도 하다.

 

약 1달전 갈만한 산을 찾지 못해 고민 하던중 J산악회 카페에 들어 갔더니 1호차는 만석이고 2호차는 30명이 모객되면 출발한다는 조건으로 모객중임을 알고 파노라마님도 남산을 제대로 못했다하여 서둘러 23번. 24번. 자리를 예약하고 선입금 한다.

 

요즘같은 산악회의 불황에 41석 버스 2대가 만차로 떠남은 저가 비용(22,013원)으로 운영하는 노하우 탓일가? 산행지가 좋은 탓일가? 아님 저가비용에 좋은 산행지 탓일가?

 

2차백두대간때 함께한 초록별님도 만난다.2호차 대장은 1차백두대간때 같이한 “가을국화”님이라 모두 반갑다.11;50 삼릉주차장에 내려 산행 시작한다.

 

0km 0분[삼릉주차장]

도로따라 조금 진행하니 우측 소나무 숲 앞에 선덕여왕 촬영지 간판이 보이고 우향 비포장 임도에 들어서 조금 진행하니 우측으로 삼릉이다.구불구불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한다.신라인들이 당시 서라벌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조성하다보니 곧은 소나무는 죄다 베어내 목재로 써버렸고, 휘어진 소나무만 남아 그 자손을 퍼뜨려서 지금의 울창한 숲을 이뤘다는 이야기다. 그 쓸모없는 소나무들이 지금은 남산의 명물인 소나무 숲이다. [0.25km][5분]

 

0.25km 5분[삼릉]

실질적인 산행 시작 지점이다.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 사이에 위치한 3개의 거대한 봉분이 삼릉(사적 219호)이다.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시대 왕릉 37개 중 확실한 것은 비석이 남아 있는 2개(무열왕릉과 흥덕왕릉) 뿐이다. 나머지는 사료가 없어 모두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신라 왕릉은 항상 진위 논쟁의 중심에 있다. 가령 원성왕릉도 1970년대까지는 문무왕릉이었다. 신라 왕릉에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한 때는 경주 이씨, 김씨, 박씨 족보 찾기가 한창이었던 조선 중기인 1730년대 무렵. 이 시기 전승된 것을 합쳐 28개 왕릉이 지정돼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이후 발굴과 명명을 통해 현재까지 37개의 왕릉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배리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소나무 숲을 따라 삼릉에서 500m쯤 올라가면 처음 만나는 불상이다. [0.5km][10분]

 

0.75km 15분 [석조여래좌상]

삼릉에서 500여 m쯤 가면 높이 1.6m, 무릎 너비 1.56m의 큰 석불좌상이 큰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은 머리 부분이 없고 무릎도 파괴돼 손 모양을 알 수 없다. 1964년 발견돼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화려한 옷 주름과 매듭으로 보아 신라 문화가 가장 번성한 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옷 주름까지 생생한데 머리가 없어 더 기억이 생생하다. 불교가 심하게 탄압받은 시대 남겨진 파불(破佛)의 유산이다.

경주 남산에는 이처럼 머리 없는 불상이 적지 않다. 많은 유적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부서지고 무너지고 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어 온전치 못하다. 하지만 온전치 못한 폐탑과 폐불 또한 고즈넉한 산세와 어우러져 온전한 것 못지 않게 아름답다. 또한 그 처연함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0.01km][1분]

 

0.76km 16분[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

왼쪽 산등성이에는 ‘미스 신라ʼ로 불리는 [마애관음보살상]이 자태를 뽐낸다. 입술이 연지를 바른 듯 붉고 예쁘다. 신라의 석공이 붉은빛이 도는 돌에 입술을 새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관음보살상만 볼 것이 아니다. 뒤를 돌아서 관음상이 바라보는 곳으로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아름다운 남산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와 다시 한번 감탄이다. 이곳 뿐 아니라 경주 남산의 모든 불상이 다 그렇다. 뒤를 돌아 부처님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경주 남산을 제대로 감상하는 포인트다.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은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보관과 함께 이 불상이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불상 뒷면에는 기둥 모양의 바위가 광배(光背)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한 느낌이다.

이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은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의 소나무 숲속에서 출토되어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등산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바위에 선각된 불상이 나온다.선각육존불이다.[0.34km][6분]

 

1.10km21분[선각육존불]

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21호)은 바위 면에 철필로 그림을 그린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음각은 찾아보기 힘든 신라시대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동쪽 바위 면에는 석가모니 삼존불, 서쪽 바위 면에는 아미타 삼존불이 그려져 현생과 내생을 드러낸다.

이 바위 위로 200m쯤 더 올라가면 거대한 절벽 바위가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도 선각된 불상인 마애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159호)이 나온다.[0.2km][6분]

 

1.30km 27분[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159호)은 몸체는 선각했는데 반해 얼굴은 깎아 내 돋을새김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남산 문화재 중 가장 늦은 시기인 고려 초기(10세기 중엽) 작품으로 추정된다.

약간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오면 좁은 등산로에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이 눈에 띈다.[0.10km][3분]

 

1.40km 30분[석조여래좌상]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앉은 이 좌상은 1960년대 파손돼 2009년 복원됐다. 노천불로 주위에 다른 건물이 들어선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지형상 나무를 쳐야 하는데 이렇게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부처가 비바람을 맞더라도 없어야 한다는 당대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좌상의 10여 m 앞에는 석탑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삼릉계 삼층석탑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소장되고 있다.

계속 금오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거대한 바위에 양각된 높이 6m의 좌상이 나온다.[0.53km] [10분]

 

1.60km 40분 [마애석가여래좌상] (磨崖石迦如來坐像)

상선암이다. 조그만 암자다.상선암 마애대좌불(지방유형문화재 158호)로 남산에서는 두 번째로 큰 불상이며 통일신라 후기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등산로를 타고 좀 더 올라가 상선암 마애대좌불을 내려다보면 마치 불상이 바위를 뚫고 나와 기도를 하는 중생들을 내려다보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의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높이는 6m이다. 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있으며, 반쯤 뜬 눈은 속세의 중생을 굽어 살펴보는 것 같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감있게 깊게 새겨서 돋보이게 한 반면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겼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양식의 마애불로 추정된다.

상선암 건물 가운데 등산로 표지판 따라 오르다보면 등로는 능선길로 접어들어 편안하게이어가고 전망이 좋아 서라벌 벌판 전체가 보이는 금송정터와 그 옆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를 거쳐 금오산 정상(해발 468m)에 이른다. [0.96km][25분]

 

2.56km 65분[금오산]金鰲山468m)

국립공원이라 정상에는 사람이 많다. 간신히 정상석을 배경으로 증명사진 남긴다.능선아래는 임도가 따라오는데 능선길 따르다가 임도 만나 임도따라 하산길로 들어선다.

 

약 10분후 좌측으로 “용장사지” 이정표 만난다. 용장사지 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 다녀 오고 싶다. 왕복1.1km정도 거리다. 그러나 갈 길이 멀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포기한다.“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186호)은 산 중턱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은 장관이다고한다.

이하 다른분의 설명을 옮긴다.[용장사지 동편 능선 위에 위치한 이 석탑은 8세기 중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3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는데 높이가 4.5m 정도다. 하지만 해발 200여 m에 위치한 산 바위를 기단석으로 하고 있어 석탑의 총 높이는 200여 m라고 달리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라는 것이다. 탑 기단석을 산 바위로 삼아 남산과 조화를 꾀한 신라인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조금 더 하산하면 바위 벽면에 얇게 돋을새김된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을 발견할 수 있다. 역시 8세기 중엽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상 앞에는 “용장사지 삼륜대좌불”(보물 187호)이 있다.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 있는 형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사료다. 대좌의 높이는 3.15m, 불상의 높이는 1.41m로 총 높이는 4.56m에 달한다.

“용장사지”는 조선 초기 학자 김시습이 설잠 스님으로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절터 축대와 기와 조각만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에 닿으니 김시습이 남긴 시 '용장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용장골 골 깊어/오는 사람 볼 수 없네/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작은 창가엔 사슴 함께 잠들었어라/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쌓였는데 깰 줄을 모르는구나/억새처마 밑에서 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임도가 좌측으로 휘었다가 다시 우측으로 휘어저 조금 진행하면 거대한 석불을 안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삼화령 대연화대를 통과한다. 약3분정도 더진행하면 설명판 서있는 삼화령 대연화대에 도착한다.[0.60km][15분]

 

3.16km80분[삼화령 대연화대]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는 높은 곳을 의미하며 남산에는 세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삼화령(三花嶺)은 신라 시대의 화랑(花郞)이 기예를 닦던 장소이자, 미륵 사상이 융성했던 곳이다. 선덕여왕시절 생의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나를 파내어 고개위에 안치 해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또한, 이 곳이 미륵의 성지였음을 밝혀주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3월 3일에 경덕왕이 신하들과 함께 귀정문의 누각에 나가서 이르기를, 뜻과 예절을 갖춘 승려를 데려 오라고 하였다. 이 때 검소한 옷을 입은 승려 한 사람이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불러 영접하였다. 승려가 들고 있는 삼태기 속에는 다구만이 가득하였다. 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 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삼화령이 미륵불과 인연이 있는 곳임이 밝혀졌으며, 경주 남산성 부근에서 삼화령과 관련된 석불 3존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륵 세존이 있었다는 삼화령의 위치와 석불 3존에 대한 존명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이를 추측하는 다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높은 곳에 들르지는 못하고 처다보고 사진을 남기고 설명판을 읽는 것으로 대신 한다.그리고 임도따라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칠불암 갈림길 이정표도 만나고 임도버리고 숲길 진행하니 이영재다.[0.7km][10분]

 

3.86km90분[이영재]

400봉과 415봉을 거쳐 칠불암 갈림길에 선다.이정표서있다.숲길지나 칠불암 갈림길통과하고 고씨 묘지나고 봉화대 능선 버리고 이정표 방향따르니 (90도 우향 진행하니) 백운재다.[2.54km][40분]

 

6.40km130분[백운재]

이정표(용장마을3.15km/고위봉0.5km/칠불암0.85km/통일주차장4.35km)서있다. 백운재 갈림길에서 이정표 방향대로 직진 오르니 고위산이다.[0.5km][15분]

 

6.90km 145분[고위산高位山494m]

삼각점과 정상석이 반긴다. (cf 우향 능선은 암릉지대라 겨울철은 삼가는 것이 좋다.)직진 공원지킴터 지나 목책 계단길 내려서 고위능선을 타고 안부까지 진행한다.열반재다.[1.3km][20분]

 

8.20km165분[열반재안부]

이정표 방향 따라 90도 우향 내림길 내려서면 약10분후 관음사다. 관음사에서 좌측으로임도따라 내려오면 약6분후 청우사 만나고 도로따르면 경주와 양산간 도로만나고 우측으로 조금 이동하면 용장1리 기와집 밥상 입간판있는 주차장에서 15;00 산행 1마감한다.[1.6km][25분]

 

9.80km190분[용장1리주차장]

버스에서 대충 닦고 새옷 갈아입고 근처 식당에서 경상도에서는 보기드물게 맛있는 두부김치와 추어탕에 맥주잔으로 건배하고 후미들 기다린다.약 2시간후 후미들 도착 17;00 용장1리주차장을 떠나 양재역 21;30도착 22;30 귀가한다.

 

약3시간10분 산행에 10시간 길에서 버리고 2시간 후미들 기다리는 노천 박물관 경주남산 (南山468m)- 금오산(金鰲山468m)과 고위산(高位山494m)산행을 마감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에 다녀오고도 남을 용장사지와 칠불암을 다녀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한다.언제 또 경주 남산을 가겠는가?

 

참고로 경주남산을 ◈ 東南山 과◈ 西南山 으로 구분해본다.

◈ 東南山

•왕정골[王井谷(왕정곡)]

반월성(半月城) 앞 골짜기로 대궐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 있어 왕정골이라고 불린다. 인용사(仁容寺)터·천관사(天管寺)터 등 3군데의 절터와 석조여래입상 1체, 석탑 5개, 불상대좌 2개, 정자터 3군데가 발견되었다.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신라 사람들이 지었다는 인용사 터에는 2기의 탑 잔재와 팔방대좌(八方臺座)의 지대석(址臺石)이 남아 있다.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던 천관사 터에는 탑재(塔材)·주춧돌이 널려 있다. 높이 2m, 나비 1m인 여래입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 밖에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고려 왕건(王建)에게 글을 올린 곳인 상서장(上書莊)이 있다.

•절골[寺谷(사곡)]

상서장 동쪽 양지(陽地)마을의 뒤쪽 골짜기로, 절터의 흔적으로는 3층석탑의 탑재가 남아 있다.

•부처골[佛谷(불곡)]

남산 동쪽 기슭 인왕리에 있는 계곡으로 3군데의 절터, 석불 1체, 마애불 1체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198호로 지정된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은 높이 3.2m, 나비 4.5m의 바위에 1m 깊이로 판 감실(龕室)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전해진다.

•탑골[塔谷(탑곡)]

부처골과 미륵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절터 2군데와 석불 1체, 마애불 22체, 석탑 4기,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탑골 입구에는 거대한 바위의 4면에 부처·보살·신장상(神將像)·동물·탑·비천(飛天)·수목 등을 새긴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이 있다.

•미륵골[彌勒谷(미륵곡)]

배반동(排盤洞) 경주임업시험장 뒤쪽 골짜기로 보리사(菩提寺)와 석불 1체, 마애불 1체, 석탑 2기가 있다. 보리사 경내에 보물 제136호인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이 있으며 절 입구에서 동쪽 300m 되는 곳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이는 높이 0.9m의 좌불로 전체높이 1.5m의 광배형 감실에 안치되어 있다.

•천암골[千巖谷(천암곡)]

화랑교육원의 북서쪽에 있는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사적 제187호 왕릉은 4각으로 다듬은 돌로 둘레돌[護石(호석)]을 쌓았으나 덮개돌[上石(상석)]·난간 등이 전대의 왕릉에 비하여 빈약하다.

•철와골[鐵瓦谷(철와곡)]

통일전(統一殿)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다른 곳에 비하여 골이 깊고 넓다. 2군데의 절터와 석탑 2기, 정강왕릉(定康王陵) 등이 있으며 1959년 이곳에서 발견된 불두(佛頭)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불두의 높이가 1.53m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불상 전체높이는 10m가 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 중 <거문고갑을 쏘라>는 전설을 가진 사적 제138호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국사골[國師谷(국사곡)]

탑마을과 서출지가 있는 안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4군데의 절터와 석탑 4기, 석등 2기, 대좌 2기 등이 발견되었다. 절터에서는 축대·기단면석·갑석과 탑의 뚜껑돌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상사바위[想思巖(상사암)]·고갈바위·큰지바위·부석(浮石;버선바위) 등의 기암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산골[鰲山谷(어산곡)]

남산동 남쪽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개선사(開善寺)터와 마애불 1체가 발견되었으며 골짜기 아래에는 몇 기의 고인돌이 있다. 개선사터에 있는 높이 1.7m, 나비 0.56m의 약사여래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대지암골[大地巖谷(대지암곡)]

남산동 탑마을을 지나는 골짜기로 탑마을에서는 4군데의 절터와 보물 제124호인 남산리삼층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양피사(讓避寺)의 것이라는 설과, 피리사(避里寺;뒤에 食佛寺)의 것이라는 설이 전해온다.

•쑥두듬골[蓬丘谷(봉구곡)]

남산동 남쪽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골짜기로 절터와 석탑 2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동탑(東塔)은 불국사역 앞 로터리에 옮겨져 있다.

•승소골[僧燒谷(승요곡)]

남산동 계곡 중 마지막 지류가 있는 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높이 3.6m의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천동골[千洞谷(천동곡)]

승소골과 봉화골 사이의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등 1기, 돌기둥[石柱(석주)] 2개가 발견되었다. 높이 2m, 나비 0.6m의 돌기둥에는 100개 가량의 감실을 파고 불상을 안치했던 흔적이 있다.

•봉화골[烽火谷(봉화곡)]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 마애불 8체,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대 1기, 경석(經石) 1개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200호인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은 큰 바위에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칠불암 뒤에 높이 솟은 바위에는 보물 제199호인 높이 1.9m, 나비 1.3m의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 西南山

•식혜골[識慧谷(식혜곡)]

동남산의 왕정골과 가장 가까운 골짜기로 사제사(四祭寺)를 비롯한 2군데의 절터, 남산성과 포비암(布飛巖) 등이 있다. 사제사터에서 발견된 팔부신중을 새긴 기단면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적 제22호인 남산성은 진덕여왕 때 쌓은 것을 문무왕 때 보수한 것으로 둘레가 4㎞에 이르며, 포비암은 식혜골 정상에 있던 바위로 베짜던 곳이라 하여 베나리바위라고도 한다.

•장창골[長倉谷(장창곡)]

식혜골에서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7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4기, 석등 2기, 당간지주 1개 등이 발견되었다. 그 중 삼화령석조미륵삼존불상(三花嶺石造彌勒三尊佛像)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고 천은사(天恩寺)터에는 초석, 탑의 뚜껑돌 등이 남아 있다. 또 식량 저장소였던 장창과 사적 제173호인 일성왕릉(逸聖王陵)이 있다. 남간사(南澗寺)터 부근에는 신라 초기 6촌(村)의 하나인 양산대(楊山臺)가 있으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관련된 사적 제245호 나정(羅井)도 이 골짜기에 있다.

•포석골[鮑石谷(포석곡)]

탑정동(塔井洞) 포석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원래 부흥골[富興谷(부흥곡)]이었으나 포석정의 이름을 빌어 포석골이 되었다. 10군데의 절터와 석불 2체, 마애불 1체, 석탑 8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연꽃 위에 앉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는 높이 1m의 마애여래상 외에도 사리탑·남근석(男根石)·상사바위가 있다. 대표적인 절터로는 창림사지가 있으며 목 없는 비로자나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유느리골[潤乙谷(윤을곡)]

포석골의 상류로 해목령(蟹目嶺) 남쪽에서 남산성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다. 2군데의 절터와 마애불 3체,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0.8m의 약사여래삼존불은 ㄱ자형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기암골[碁巖谷(기암곡)]

포석골의 한 갈래로 배실이라고도 한다. 3군데의 절터와 석불 1체, 석탑 4기, 석등 1기가 발견 되었다. 머리 없는 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산봉우리의 바둑바위 부근에 금송정(琴松亭)터가 있다.

•선방골[禪房谷(선방곡)]

포석정의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보물 제63호인 배리석불입상은 배동삼체석불이라고도 하며 조각솜씨가 석굴암과 견줄 만하다. 주위에는 삼불사(三佛寺)·망월사(望月寺)가 있다.

•삼릉골[三陵谷(삼릉곡)]

배동(排洞) 배리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냉골[冷谷(냉곡)]이라고도 한다. 8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으며, 사적 제219호인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신덕왕릉(神德王陵)·경명왕릉(景明王陵) 외에 경애왕릉(景哀王陵) 등 4개의 능이 있다. 그 밖에도 목 없는 석불좌상, 삼릉계선각불상군으로 불리는 6존불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호인 마애관세음보살상, 제158호인 마애선각여래좌상, 제159호인 마애석가여래좌상, 보물 제666호로 지정된 경주삼릉계석불좌상 등, 석불 3체와 마애불 11체가 있다.

•삿갓골[笠谷(입곡)]

삼릉골의 지류로 경애왕릉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3군데의 절터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경주남산입곡석불두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상반신만 남아 있으나,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약수골[藥水谷(약수곡)]

배동 뒷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산호골[珊瑚谷(산호곡)]이라고도 한다. 6군데의 절터와 여래좌상 1체, 마애여래대불 1체, 석탑 1기가 발견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부분이 손실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마애불은 높이 10m로, 남산의 마애불 중 가장 크다. 박혁거세 6세손인 지마왕(祗摩王)의 능으로, 사적 제221호인 지마왕릉도 있다.

•비파골[琵琶谷(비파곡)]

배동 앞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석가사(釋迦寺)·불무사(佛無寺) 등 4군데의 절터와 4기의 석탑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절의 창건연대는 692년으로 전해진다.

•용장골[茸長谷(용장곡)]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의 계곡으로, 용장사를 비롯한 11군데의 절터와 석불 5체, 마애불 1체, 석탑 6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은 각각 보물 제186호와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두와 약사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보물 제913호로 지정된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은 높이 1.62m, 나비 1.1m로, 삼층석탑 아래의 높이 10m 암벽에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용장골에서는 대좌 1기와, 비를 세웠던 귀부(龜趺) 1기 등이 발견 되었다. 용장사는 김시습(金時習)이 기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곳이다.

•천룡골[天龍谷(천룡곡)]

남산 최남단에 있는 골짜기로, 천룡사터를 비롯한 3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 외에도 주춧돌·귀부·법당터·석조(石槽)·부도·대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천룡사는 원래 수리사(水利寺)였으나,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중건하면서 천룡사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폐사(廢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