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령산(209m) 왜봉산(279m)깃대봉[1] ( 195m △경북367)깃대봉[2]( 234m △예천464)봉우산(245m) 연화산(267m)/경북 예천
진령산(209m) 왜봉산(279m)깃대봉[1] ( 195m △경북367)깃대봉[2]( 234m △예천464)봉우산(245m) 연화산(267m)/경북 예천
산행일자; 2025년 4월 26일 (토) . 날씨; 맑음. 산행거리;12.8km 산행시간; 3시간 52분(10;52~14;43)
교통편; 아리솔마운틴 클럽
비용;40,000원(하산 후 막걸리와 현지식당 식사제공비용포함)
산행코스;수동마을 버스정류장(수월 1리 마을표지석)→마을도로 → 예천군 지보면 수월리 72-1 –마을도로 →내동마을직전 좌측임도 → 산길진입 → 꾸준한 오름길 → 진령산 → 급경사내리막길 → 완만한 능선길 → 왜 봉산 → 깃대봉(경북 367) → 28번 도로(예지로) → 깃대봉(예천 464) → 봉우산 → 연화산 → 마전버스정류장( 경북 예천군 지보면 마전리 )
■예천은 봉황의 도시다. 지역명의 한자 뜻은 단술 예(醴), 샘 천(泉)으로 예로부터 봉황은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봉황의 기운이 서린 도시여서 인재가 많고 장수하기로 소문난 고장이다. 예천군은 경상북도 서북쪽에 있는 군. 칠곡군에 이어 경상북도의 군 중 2번째로 인구가 많다. 경북 북부 지역은 전통 유교문화의 영향이 강해 남아선호사상이 심한 지역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예천은 1980년 이래 전국에서 남아 출생성비로 1위를 놓친 적이 거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남아선호사상이 갈수록 약화되는 추세는 여기도 마찬가지라서 지금은 적정 수준의 출생성비를 유지하고 있다 예천(醴泉)의 어원은 단술 례(醴)와 샘 천(泉)이다. 민간어원적인 이설로는 '크고 넓은 땅'을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인 '단슬얼'로 불렸던 이곳의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착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예천이라는 지명은 중국 산시 성 예천현에서 따왔는데 명 숭정제 때 지어진 <예천현지>에 따르면 漢 선제(宣帝)가 이곳에 궁을 지을 때 샘물에서 단맛이 난 것을 발견하여 醴泉(예천;단술 샘)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예천은 북쪽은 백두대간(소백산맥), 남쪽은 낙동강 본류에 접하며, 군 가운데로 내성천이 굽이굽이 흐른다. 풍양면은 예천군에서 유일하게 낙동강 이남에 위치해 있는 면이다. 큰 강인 낙동강이나 내성천 주변에는 정작 제대로 된 평야가 없고, [10] 내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하류(예천읍 일원)에 비교적 너른 평야가 있다. 대략 북쪽 일원(효자, 은풍)이 산악지형, 중앙(예천읍, 유천, 개포, 용궁, 호명)이 평지 혹은 구릉성 지형, 동부(감천, 보문)와 남부(지보)는 산지가 많은 지형이다. 용문은 중앙(예천읍)에서 북쪽(효자, 은풍)이나 서북쪽(문경 동로면)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중앙은 평지이고, 외곽이 산지인 전형적 분지 지형을 이룬다. 풍양은 예천군에서 유일하게 낙동강 이남에 위치한 면으로서, 북쪽과 남쪽은 산지이고, 중간이 평야이다.
■지보리(知保里)는 예천군 용궁현(龍宮縣) 예하면(內下面) 지역이다. 사람이 살자면 예나 이제나 강(江)과 무관할 수는 결코 없다. 낮은 산에 넓은 강 그리고 넓은 들 이것이 사람 사는 이상향이다. 수륙교통의 요지(要衝地)가 지보리(知保里)이다. 따라서 촌락(村落)이 형성된 지는 무척 오래이며 문헌을 더듬으면 고려(高麗) 때까지 소급(溯及)할 수 있고, 한때 면행정(面行政)의 중심지(中心地)이기도 했다. 학가산맥(鶴駕山脈) 태을봉(太乙峰) 청룡등(靑龍嶝) 안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 박 씨(朴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개척 당시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수령이 4백 년이 넘었으며, 지금은 고령이나 아직도 일부는 청청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산 밑에 있는 동래정 씨(東來鄭氏) 재사(齋舍)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지보암(知保庵)이고 지금도 들보에는 중들이 메투리 날을 울던 자국이 남아 있고 여러 가지 전설이 있으나, 이 지보암(知保庵)으로 인하여 1914년 면(面)이 통합될 때 지보면(知保面) 지보리(知保里)가 명명(命名)된 듯하다. 이 지역은 신라(新羅) 때 불교(佛敎)가 전성할 때의 대암사(大岩寺)라는 사지(寺趾)가 남아 있고, 불타산(佛陀山)의 암자(庵子) 지보암(知保庵) 부채 등 빙고등(氷庫嶝) 석탑(石塔)이 있고, 도처에 큼직한 고려장(高麗葬)들이 널려 있다. 지보면(知保面)이 발족되자 행정중심지(行政中心地)로서 면소재지(面所在地)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 사설학당(私設學堂)이 있었으며, 앞 강(江) 변 마을에는 지보시장(知保市場)이 형성되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뒤 낙동강(洛東江) 수해로 인하여 구마전(舊麻田)으로 시장(市場)이 이전(移轉)하였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했으므로 낙동강(洛東江)을 이용하여 안동(安東) 김해(金海) 간(間) 소금배로 미곡(米穀)을 무역해서 면민(面民)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낙동강(洛東江) 상류인 소백산(小白山) 춘양(春陽) 등지에서 송림(松林)을 채벌(採伐)하여 낙동강수(洛東江水)가 범람할 때 뗏목을 베어 하류로 띄워서 그 재목으로 가옥 건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34년 갑술년(甲戌年) 대홍수(大洪水) 때는 안동(安東)의 유명한 영호루(映湖樓)와 많은 가옥이 붕괴(崩壞)되어 난민들이 지붕을 타고 급류에 휘말려 표류하다가 마을 앞 섬 송림에 걸려서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듣고 이 마을 청년들은 결사적으로 배를 저어 40여 명의 인명을 구출하였으므로 활인도(活人島)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앞에는 비봉산(飛鳳山)이 높이 솟았고, 낙동강(洛東江)이 흐르는 산고 수려(山高水麗)한 마을이다. 강변에 제방을 쌓아 홍수의 피해가 없으며, 전천후공사(全天候工事)로 양수장을 설치하여 한해(旱害)가 없으며, 넓은 평야 기름진 옥토(沃土)에 많은 생산을 가져와 어느 마을보다도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교통편으로는 의성(義城), 대구(大邱), 예천(醴泉)으로 수차례씩 버스가 내왕(來往)하고 있다. 지보리(知保里)는 3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큰 마(大村);이 마을은 350년 전 능성구 씨(綾城具氏)와 남원양 씨(南原梁氏)가 자리 잡아 현재 60여 가구(家口)가 있고, 수령이 높은 느티나무가 마을 앞에 서 있다. 1950년에는 장로교(長老敎) 고신 측(高神側) 교회(敎會)가 서 있다.
새마을(新村);100여 가구(家口)가 사는 함안조 씨(咸安趙氏) 집성촌이다. 현종(顯宗) 때(1670년) 새로운 기지(基地)를 찾아다니던 조진도(趙振道)가 불타산(佛陀山) 부처 등이 둘러싸였고, 그 앞으로 낙동강(洛東江)이 흘러서 마을 터의 지세를 살피니 하늘의 금성(金星)처럼 생겼으므로 자손 번성을 가히 기약할 만하다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샛마(上洛);대촌(大村)과 신촌(新村) 사이에 있고 1906년에 기독교(基督敎)가 개척한 후 마을 이름을 상락(上洛)이라고 했다. 350년 전 남원양 씨(南原梁氏)가 택거했고, 그 후 안동김 씨(安東金氏), 용궁 전 씨(龍宮全氏)등 여러 성(姓)이 20 가구(家口)가 살고 있다. 교회를 통하여 사설학당이 있었고, 교육열이 강하여 많은 인재을 배출했다.
했마(火仁洞);동(東) 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옛날에 홰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했마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 청주정 씨(淸州鄭氏) 재실 한집이 살고 있다. 화인(火仁)은 이두문이다.
■마전리(麻田里)는 본래 용궁현(龍宮縣) 예하면(內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계리, 원학리와 병합하여 마전리(麻田里)라 했다. 석계동(石溪洞), 시끼동, 음지시끼동;임란 후(壬亂後) 연안차 씨(延安車氏)의 석은(石隱) 차후란(車後連)이 마을을 개척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으며, 북(北) 향 마을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돌과 쇠가 있어서 쇳물이 늘 흐르므로 물고기가 깃들지 못한다고 한다. 뒷산에 절골이 있는데 지금도 기와 조각이 보인다.
양지시끼동, 양지석계(陽地石溪);석계동 맞은편에 있으며 석계동보다 늦게 개척되었고, 양지바른 남향받이 이므로 양지석계라고 부르는 각성촌이고 마을 앞으로 석계천(石溪川)이 흐른다.
삼밭나드리, 구마전(舊麻田);낙동강(洛東江) 변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 구한 말까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소금배가 기착하든 나루터다. 오랜 옛날부터 장이 서고 상업의 중심지였으나, 1934년(甲戌年) 대홍수 때 떠내려 가고 장터는 지금의 위치인 백골로 옮겨가서 마전(麻田)이라 하니, 이곳은 저절로 구마전(舊麻田)이 되고 높은 지대에만 마을이 남아서 농촌이 되었고 갯가에는 삼밭이 많았으며 또는 서울로 올라가는 나루 터였다고도 한다.
월태이, 월탄(月灘);지금은 초등학교가 세워진 지역으로 지형이 조 집 모산형(朝集慕散形)이므로 개인이 살기 드세다고 한다. 옛날부터 큰 인재가 날 곳이라 하였는데 1760년대에 신동(神童)이 태어나서 월탄동자(月灘童子)라고 했으며 본명은 안필성(安必成)이다. 열 살에 학문이 대성해서 많은 일화와 작품을 남겼으나, 그가 11세에 요절하자 아버지가 슬퍼하여 그 많은 유고(遺稿)를 불태우고 지금은 몇 편만 남아 있다.
워낙 골, 원학(元鶴, 元學);40여 가구의 연주현 씨(延州玄氏) 집성촌이다. 고려말 이조(李朝) 초(初)에 사월(沙月) 현옥량(玄玉亮)이 고려(高麗) 세신(世臣)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통탄하고, 이태조(李太祖)가 높은 벼슬로 부르는 대도 응하지 아니하고 지금의 호명면(虎鳴面) 사월(沙月)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이 이곳으로 이주하여서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오래된 촌락(村落)이기도 하다. 지세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학성정이 있었다 하여 유래(由來)된 마을이라고 한다.
백골, 요성(腰城), 마전장터(麻田市場);1934년 갑술년(甲戌年) 큰 장마로 낙동강(洛東江) 물이 범람하여 구마전(舊麻田)에 있던 장터가 이곳으로 옮겨 와서 마을이 번창해지자 마전(麻田) 장터라 했으며, 맞은편이 소화리(所華里) 백골이다.
삼거리;구마전(舊麻田)의 한 마을이며 대구(大邱) 안동(安東) 예천(醴泉)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목이다. 낙동강(洛東江)에 소금배가 오르내릴 때는 마전(麻田) 도방이라고 하여 소백산(小白山) 이남의 화물 집산지였고, 지금은 낙동강(洛東江)에 지인교(知仁橋)가 가설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등말랭이, 비선거리;구마전(舊麻田) 복판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등말랭이는 안동(安東)과 상주(尙州)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이유인(李裕寅)을 비록 하여 용궁현감(龍宮縣監), 유교목(柳敎睦) 정인량(鄭寅亮) 김상일(金相一)등의 선정비가 있으므로 비선 거리라기도 한다. 또 이곳에는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정기선(鄭基善)의 선정비(善政碑)가 있었는데 그 비석은 쇠로 되었으며, 돌비는 음각(陰刻)이지만 이 비는 양각으로 주조된 특이한 비다. 1934년 대홍수로 비각이 무너지면서 두 동강 난 것을 도장리(道庄里) 정사(鄭賜)의 묘역 산기슭으로 옮겨 세웠다.
■문수지맥(文殊枝脈)은 백두대간 옥돌봉(1,244m) 서남쪽 280m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 하며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1207.6m), 갈방산(712m), 만리산(791.6m), 용두산(665m), 복두산(509m), 요성산(490m), 박달산(580m), 봉수산(569.6m), 천등산(575.4m), 조운산(635m), 학가산(874m), 보문산(641.7m), 대봉산(210m), 검무산(331.6m), 나부산(330m)을 일구고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도 상거리 약 114.5 km 정도 되는 산줄기이다.
낙동강의 서쪽과 내성천(乃城川)의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로, 백두대간 박달령과 도래기재사이에 솟은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갈래 친 산줄기는 문수산(文殊山 1207.6m)으로 내려와 봉화군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명호의 만리산(791.6m), 도산의 용두산(665m)을거쳐 녹전의 봉수산(569.6m), 북후의 불로봉(482m)으로 이어진 뒤 안동의 조운산(朝雲山 635m)을지나 학가산(鶴駕山 874m)에 이른다.
학가산으로 향하는 문수지맥은 조운산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 갈래를 나누어 봉정사가 있는 명산 천등산(天燈山 575.4)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문수지맥의 원 흐름은 학가산에서 보문산(641.7m)으로 이어진 뒤 풍천의 검무산(331.6m)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의 나부산(334m)을지나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삼강리(三江里)를 돌아 예천의 명물로 알려진의성포(義城浦)의 맞은편 절벽인 회룡대(回龍臺)에서 끝난다.
옥돌봉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이다. 문수산까지 물야면과 춘양면 경계로 가다가 문수산에서 봉성면을 만나고 이어 동쪽은 법전면을 잠시 스치다가 명호면이 된다. 긴재에서 상운면과 명호면의 경계로 가다가 만리산을 지나 월오현에 이르면 왼쪽(남)은 안동시가 된다. 안동시 녹전면으로 들었다가 박달산에 오르면 영주시와 접한다. 영주시 평은면에 잡시들었다가 다시 안동으로 빠져나오고, 학가산에 오르면 예천을 만난다. 후 예천과 안동시계를 따르다가 지보면에 들면 온전히 예천이다. 마지막 회룡포는 예천군 용궁면이고 삼강다리 아래 내성천 건너마을은 문경시가 된다.
2025년 04.26(토)(07;05) 신논현역 8번 출구 나와서 (07;00) 논현역 출발 신논현역 8번 출구 앞에 대기 중인 아리솔마운틴 클럽 대원고속버스에 탑승합니다. 강남, 양재, 복정을 거친 후 죽전 , 신갈간이정류장에서 대원들 탑승하니 대원들 14명입니다. 모객미달로 취소 들어올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적자 감수 배하사 회장님이 진행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차는 중간 금왕휴게소에서 휴게시간 약 10분 (09;40~09;50) 갖고 (10;44) 영주 TG 빠져나와 28번 도로를 달리다가 용성로에 접어들어 (110;52) 산행들머리로 잡은 경북 예천군 지보면 수월 1리 내동마을입구 버스정류소에 도착 바로 산행 시작합니다.
0km 0분[내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10;52)
산행시작한다. 수월 1리(내동) 마을 방향 마을도로 따라 들어간다.
(10;52) 산악회버스에서 하차 산행시작합니다
(10;52) 수월 1리(내동) 버스정류장입니다.
(10;52) 수월 1리(내동) 표지석입니다
(10;53) 내동마을길 따릅니다
(11;05) 내동마을입구에서 좌측 능선을 향해 오르고 우향 산길 진입합니다
(11;12) 조망입니다
1.5km 25분[진령산](209m)(11;17)
삼각점(판독불가) 있다. 앞서간 신상호 님 표지기 옆에 "진령산209m 배창랑과 그 일행=山君들"표지기 건다.
(11;17) 진령산(209m) 정상 삼각점(판독불가)입니다
(11;18) 진령산(209m) 정상 표지기입니다
(11;18) 진령산(209m) 정상 표지기 인증사진입니다
(11;50) 임돌르 건넙니다
4.2km 76분 [왜 봉산](279m)(12;08)
문수지맥상의 산이다. 많은 선답자님들 표지기 걸린 왜 봉산 (279m) 정상이다.
(12;08) 왜 봉산(279m) 정상입니다.
(12;08) 왜봉산(279m) 정상 인증사진입니다.
5.3km 98분 [깃대봉(1)](195m)(12;30)
삼각점(경북 367) 있다.
(12;30) 깃대봉[1](195m) 정상 삼각점(경북 367)입니다.
(12;30)깃대봉[1](195m) 정상신상호님 표지와 "깃대봉[1] 경북 367 195m 배창랑과 그 일행 =山君들"입니다. 입니다.
(12;30) 깃대봉[1](195m) 정상신상호님 표지와 "깃대봉[1] 경북 367 195m 배창랑과 그 일행 =山君들" 인증사진 입니다.
(12;34) 좋은 등로 따라 내려섭니다
(12;34) 조망입니다
(12;38) 28번 도로를 좌측으로 따릅니다. 농로길 따라 들어가 능선길 오르면 깃대봉[2] 정상입니다
7.7km 139분 [깃대봉(2)](234m)(13;11)
삼각점(예천 464) 있다.
(13;11) 깃대봉[2](234m) 정상 삼각점(예천 464)입니다.
(13;11) 깃대봉[2](234m) 정상입니다
(13;11) 깃대봉[2](234m) 정상 인증사진입니다
7.8km 144분 [봉우산](245m)(13;16)
데크전망대 설치되어 있다.
(13;16) 봉우산(245m) 정상 데크전망대 인증사진입니다.
(13;16)봉우산(245m) 정상 표지기입니다
(13;16)봉우산(245m) 정상 표지기 인증사진입니다
(13;18) 문수지맥 마루금 10구간 표지판입니다
(13;21) 이정표입니다
(13;21) 문수지맥 버리고 대피소 뒤능선을 이어갑니다
(13;28) 임도에 내려서 임도 따라 오랫동안 진행합니다.
(13;31) 조망입니다
(13;45) 한전 송전탑입니다
(13;55) 연화산입구 산길로 진입합니다
(13;58) 묘목밭을 통과합니다
10.7km 194분 [연화산](267m)(14;06)
삼각점(판독어려움) 있다. 대구 김명근 님 표지기. 신상호 님 표지기 옆에 " 연화산 267m 배창랑과 그 일행=山君들"표지기 건다
(14;06) 연화산(267m) 정상입니다.
(14;06) 연화산(267m) 정상입니다.
(14;06) 연화산정상 삼각점(판독어려움)입니다
(14;31) 한전철탑봉에서 우회전입니다
(14;35) 임도에 내려섭니다
(14;36) 28번 고속화도로밑 굴다리를 통과합니다
(14;41) 마전마을입니다
12.8km 231분 [마전버스정류장](14;43)
산행종료한다.
(14;43) 산악회버스입니다
(14;43) 마전마을 버스정류장 근처 길가 공터에 대기중인 산악회 버스입니다
(14;43)마전마을 버스정류장입니다
(14;43~15;30)[47분] 신상호사장님이 챙겨주신 아리솔마운틴 클럽 제공한 시원한 막걸리 냉장공에서 2병 꺼내 함께 고생한 누리님과 건배 무사산행을 자축합니다. 누리님 텐트로 가서 옷 갈아입고 버스 안에서 대충짐정리하고 새 옷 환복합니다. 약 500m 거리 지보면 양반골식당으로 이동 (15;35~16;10)[35분] 테이블메이들과 건배 아리솔마운틴 클럽제공 동태탕으로 늦은 점심식사 합니다 (16;10) 식당을 출발 양재역 (19;00) 경 도착 (20;00) 경 귀가합니다
로커스 트랙지도
오룩스맵 Korea트랙지도
산행기록표(약 0.3km/4분 늦게 ON)
실트랙